장롱면허 20만명, 낙수관리전문 보건복지부
세상 일 중에서 제일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고 한다. 콜센터 직원, 교사 등을 감정노동자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나마 그들은 신체적으로 정상적인 사람을 상대한다. 의료인은 몸과 마음이 상하고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다.( 그나마 그들은 대체로 아프지 않은 분들을 상대한다. 반면 의료인은 몸과 마음이 상하고 망가진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다.) 더구나 의료인은 단순히 사람을 상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몸에서 분비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들을 다루는 일이다. 대변, 소변, 피, 고름, 콧물, 눈물, 가래침 등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치는 것들을 매일 상대하면서 사는 것이 의료인이다.
얼마전에 항문외과를 개업하신 의사 한 분이 TV 예능프로에 출연해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항문외과의 특성상 환자의 얼굴은 기억 못해도 항문은 기억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항문을 들여보다 보면 가끔 항문을 통해 분출되는 대변을 얼굴에 뒤집어쓰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환자가 무안해할까봐 얼굴 표정 하나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파독간호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타깝게도 MZ세대에게는 이미 잊혀진 과거인 파독간호사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963년~1977년 사이 광부 7,936명, 간호요원 11,057명 등이 정부의 주관 하에 서독에 파견되었다고 한다. 선진국에서도 간호인력은 대표적인 기피직종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후 선진국들은 여전히 간호직종의 구인난을 겪기는 해도 과거와 같은 국가단위의 송출은 이제 거의 없어졌다. 처우를 개선해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한국은 아직도 간호인력을 확보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간호인력이 부족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거의 30년도 넘었다. 처우를 개선해 인력 확보에 주력하는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한국의 보건복지부가 선택한 전략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바로 그 ‘낙수효과’였다.
아무리 일이 험하고 처우가 형편없어도 간호인력을 대폭 늘리면 결국엔 일을 할 사람들이 생길 거라는 논리다. 그 결과 2019년 기준으로 한국의 면허등록 간호사 수는 41만 4983만명까지 늘었지만 활동 간호사 수는 21만 5293명에 불과하다. 절반에 해당하는 20만명이 장롱면허자다. 낙수효과는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아무리 사람을 많이 늘려도 직업환경과 처우를 개선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난 10월 19일 보건복지부가 ‘필수의료 혁신 전략’을 발표하면서 차관이 “의대정원 확대가 필수의료 의사 수를 늘리는데 낙수효과가 없다는 건 1970년대 이론”이라고 했다. 이미 실패한 정책인 낙수효과를 또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누차 말했지만 요즘에 벌어지고 있는 필수의료 기피현상은 고질적인 저수가, 과도한 사법판결, 그리고 건강보험에 기생하는 실손보험 도입에 따른 비급여 시장의 성장이 그 원인이다. 의사 수가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필수 의료 진료하는데 고질적인 저수가에, 걸핏하면 법정구속에 억대, 십억대 손해배상금을 때리니까 때마침 성장한 비급여 시장으로 모든 의사들이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수가를 올려주고 과도한 사법판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비급여 시장부터 채워 넘치게 만들어 필수의료 채울 필요없이 처음부터 필수의료를 채우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데 어느 세월에 비급여 시장 채워 넘치게 만들겠다는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산불이 났는데 불 끌 생각은 아예 없고 나무를 아주 열심히 대폭 심자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부의 정책은 시스템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돈의 흐름을 설계하는 것이다. 보험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의료기관 자유이용권에 불과한 실손보험 도입해서 돈의 물꼬를 비급여 시장으로 돌린 것은 바로 정부의 정책이었다. 비급여쪽으로 대형 물꼬를 터놓고 왜 필수의료를 외면하고 비급여쪽으로 가느냐며 의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껏 들고 나온 대책이란 것이 바로 ‘낙수효과’다. 걸핏하면 낙수효과를 들고 나오는데 이쯤 되면 보건복지부가 아니라 낙수관리부라고나 불러야 한다.
20년전에 복지부 관료들을 상대로 50년 후, 100년 후에 우리나라의 의료계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 비전이나 백년대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는데 대답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2004년 전체 의사수는 62,201명이었다. 그중 약 20%에 해당하는 12,401명이 인턴, 레지던트였다. 말하자면 전체 의사의 5분의 1이 수련의였는데 의대졸업생은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 나라나 일시적으로 의사수를 늘리긴 해도 대개 매년 졸업하는 의대졸업생은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 전체 의사수가 10만에서 20만으로 증가하고 20만에서 40만으로 증가하면 전체 의사 중 수련의의 비율은 줄어든다. 이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미리 나왔어야 했다. 정부는 그런 일 하라고 있는 것이다. 의료 생태계의 변화가 뻔히 보이는데 그냥 손 놓고 있었다.
2021년 전체 의사수는 109,927명으로 대략 2배로 늘었다. 그런데 인턴, 레지던트 숫자는 20년전과 별반 다름없는 12,834명으로 전체 의사 중 비율로는 20%에서 10%로 줄어들었다. 인프라 구조가 바뀌었으니 20년전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변할 줄 몰랐다면 그것이야 말로 직무유기다.
의사 만나기가 얼마나 수월한지를 나타내는 지표인 국민1인당 외래진료횟수가 우리나라는 연간 14.7회로 OECD국가 평균 5.9회의 2.6배로 압도적인 세계 1위국을 의사부족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시의적절한 치료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사망이 치료가능사망인데 치료가능사망율이 한국은 44.0명으로 OECD 평균 79.5명에 비해 월등하게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치료받을 사람이 제대로 치료받고 있는 나라라는 OECD 통계는 어디에 버리고 의사 수 부족이라며 기껏 들고 나온 것이 인구당 의사 수 하나 들고 온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실제로 의사 수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1천명, 2천명 대폭 늘려 놓고 사단이 나면 누가 책임질 것인 것? 결국 의사들만 당하는 것이다. 어느 세월에 의대 졸업시켜 비필수 시장 채워서 필수의료를 채우겠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은 동네병원에서만 24만병상이 1년내내 빈병상으로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도 2028년까지 수도권에만 9개 대학병원이 11개 분원을 추진하면서 최소 6,600병상이 수도권에 더 생긴다고 한다. 지옥문이 열릴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한가하게 의대증원이나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미래의료포럼 대표 주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