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료포럼 성명서]
실손보험 청구대행 강제화법은 의료기관의 자유와 보험 가입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위헌적 악법이다.
지난 10월 6일 국회는 환자들의 실손보험 청구 과정에서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의료기관들이 보험회사로 전송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가결시켰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과 유사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법안은 수년 전부터 여러 차례 발의된 적이 있으나 보험사들의 과도한 환자 정보 수집으로 인한 소비자들의 불이익 우려, 환자 개인정보 유출의 우려, 개인의 사적 계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의료기관들에 부당한 요구라는 점, 실손보험사들의 이익만 극대화 시키는 정책이라는 점 등으로 인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국회는 환자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허울좋은 명분을 내세워 부당하게 의료기관에 책임을 전가하고, 결국에는 보험 가입자의 이익마저도 침해되는 위헌적 악법을 만들어 내었다.
국회에서 보험업법 개정안을 입법할 때마다 법안 발의가 필요한 명분으로 내세웠던 부분이 바로 실손보험 청구 과정이 번거롭고 복잡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실손보험 청구 과정이 번거롭고 복잡한 이유는 바로 보험사들이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보험사별로 보험금 청구 시에 요구하는 서류의 종류가 상이하고, 상당수의 보험사에서는 불필요하게 많은 서류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 이로 인해 환자들이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는 일이 늘어났던 것이다. 따라서 국회가 진정으로 환자들의 실손보험 청구 과정에서의 편의를 생각한다면, 실손보험 청구 대행을 의료기관에 강제할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보험사별로 상이하고 다양한 보험금 청구 방식의 간소화 및 표준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보험사들이 환자 정보를 이용해서 손해율이 낮은 보험 상품을 개발하고, 보험금 지급 거부 사유를 체계화 시키고자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에 보험사들은 보다 정확하면서도 가공하기 쉬운 디지털화된 데이터를 통해서 보다 손해율이 낮은 상품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환자 정보를 민간 보험사에 전자적으로 전송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이번 보험업법 개정안의 통과는 보험사들에게는 숙원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번 보험업법 개정안 통과로 인해, 보험금 지급 거부 사례가 늘어나면서 보험 분쟁이 늘어날 우려가 높고, 이로 인해 실손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금전적인 손해를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건강보험과 달리 실손보험은 보험 소비자 개인과 보험사가 맺은 사적 계약이고, 이 계약 관계에는 국가나 의료기관이 개입할 여지나 권한이 전혀 없다. 그런데 이번에 통과된 보험업법 개정안에서는 환자가 요구하면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의료기관에서 보험사로 전송하도록 하고 있고,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이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개인과 보험사가 맺은 사적 계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3자에 불과한 의료기관에 국가가 강제로 추가적인 업무 수행을 강요하는 것은 공권력 남용이고, 이를 사실상 거부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은 의료기관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명백한 위헌 조항이다.
많은 국민들이 실손보험에 가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낮기 때문이다. 이에 지금까지 정권을 막론하고 건강보험 보장률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있어왔고, 최근에는 문재인 케어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까지 동원되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부작용만 양산되었다. 건강보험료는 오르고 있지만 보장률이 답보상태에 있다 보니 건강보험만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국민들은 추가적으로 비용을 부담하더라도 보다 넓은 범위의 보장을 받고, 재난적 의료비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실손보험에 가입했다. 그리고 현재 실손보험 가입자는 전 국민의 80%에 육박하는 40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문제는 실손보험이라는 상품의 성격상 건강보험에서 혜택을 받은 내역까지도 중복으로 보장하는 등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품은 의료 이용량이 많지 않을 때는 손해율이 낮지만, 현재 대한민국처럼 세계에서 가장 의료 이용량이 많은 국가에서는 필연적으로 손해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실손보험 손해율 상승의 책임은 의료 수요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한 민간 보험사들에게 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은 민간보험사가 예측을 잘못하여 입은 손해를 국가적 차원에서 만회시켜 주려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실손보험 계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의료기관에 보험금 청구 의무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건강보험만으로도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의료 서비스 제공이 원활히 이루어진다면 굳이 민간보험사들이 운영하는 실손보험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건강보험만으로도 충분하니 불필요한 지출을 막기 위해 실손보험 가입을 만류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국회가 나서서 개정안까지 통과시켜 가면서 실손 보험사들의 이익을 챙겨주고, 간접적으로 국민들의 실손보험 가입을 확대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결국 국회와 정부도 현재의 건강보험 제도만으로는 절대로 국민들이 원하는 눈높이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현재의 건강보험 제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대한민국은 건강보험이라는 단일공보험에 모든 국민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모든 의료기관들로 하여금 건강보험 진료를 거부할 수 없도록 강제로 지정시켜 놓은 국가이다. 따라서 건강보험이 제대로 역할을 한다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추가적인 사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의료보험인 건강보험은 70년대에 낮은 부담률, 낮은 보장률, 낮은 수가를 바탕으로 설계되었고 이 시스템이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경제 수준과 국민 의식이 판이하게 다른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제도로 전락했다.
실손보험의 역할을 강조하고, 실손보험의 손해율을 낮추기 위해 이루어진 이번 보험업법 개정안의 통과는 결국 건강보험이라는 대한민국 단일공보험 체제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속 가능한 의료보험 서비스 제공을 위해서는 지금의 단일공보험 체제는 더 이상 답이 아니며, 이제는 보험 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국회와 정부는 의료기관의 자유와 보험 가입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위헌적 법안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유지해왔던 단일공보험 체제의 실패를 국민 앞에 인정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며, 새로운 보험 제도로의 개혁을 통해 지속 가능한 의료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2023년 10월 10일 미래의료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