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료포럼 통신]
"기관사없이 폭주하는 열차를 멈춰 세우는 일"
2001년 5월 15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유독물품을 가득실은 열차가 기관사 없이 폭주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47량의 화차가 달린 기관차가 기관사가 없는 상태로 최고 82km/h로 2시간동안 폭주하였고 다른 기관차를 후부에 연결하여 겨우 정차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 사고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덴젤 워싱턴이 출연한 영화 ‘언스토퍼블’입니다. 열차 가득 유독물품을 싣고 기관사 없이 폭주하는 열차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가 아주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의료는 멀쩡히 서있는 기관차를 수리하는 일이 아니라 악결과를 향해 폭주하는 열차를 멈춰 세우는 일과 같습니다. 질병이란 진행경과에 따라서 완급은 있어도 가만히 놔두면 궁극적으로 악결과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의사가 치료라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악결과가 초래되는 것이 의료의 특성입니다.
의사들이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같은 질병이라도 그 질병을 가진 사람의 특성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다가 악결과를 초래했다고 걸핏하면 형사처벌하고 거액의 배상책임을 묻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결과를 향해 폭주하는 기관차를 멈춰 세우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다가 기관차는 세웠지만 다른 악결과를 초래했다고 형사처벌하거나, 폭주 기관차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고 형사처벌하면 도대체 누가 폭주기관차를 세우겠다고 나서겠습니까?
더구나 요즘은 법원의 온정주의가 의료소송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민사소송은 형사소송에 비해 의료인의 과실을 쉽게 인정하는 경향이 있고 최근 법원이 민사소송에서 입증 책임을 더욱 완화하는 추세입니다. 일반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보통은 소를 제기한 당사자가 본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데 의료소송에서는 그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추세를 교묘히 파고들어서 요즘은 민사 손해배상 청구를 먼저하고 과실 추정된 판결문을 근거로 형사고소하는 세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의사들은 후유증없고 100% 완치될 환자들만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의료법에 환자의 진료는 거부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아 두었으니 조금이라도 중한 환자들은 아예 보지 않을 전문과로 도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험이 상시 내포되어 있는 일을 하는데 국가와 사회가 보호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자구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팔로사징후(Tetralogy of Fallot)를 가진 1세 아기를 수술하다가 사고가 생겼다며 9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팔로사징후는 호두알만한 아기 심장에 4가지 기형이 한꺼번에 존재하는 병입니다. 기형을 교정하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40세까지 95%가 사망하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최대로 살아야 40세이고 대부분은 10대를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아도 온전히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질병입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만성적 저산소증, 심부전, 부정맥 등에 시달리며 살고 뇌혈전, 뇌농양 등이 발생해 사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반 기형이 없는 경우 2세전에 완전 교정술을 받을 때도 2~3%는 수술 중 사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각종 기사를 보고 이 재판의 판결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수술 중 혈액 공급을 위해 삽입했던 대동맥 캐뉼라가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응급처치후 퇴원했지만 영구적인 인지장애 및 언어장애, 미세운동장애 등 발달장애 후유증이 남았다. 수술 당시 1세에 불과한 소아로서 대동맥의 직경이 좁아 의료진이 매우 좁은 시야에서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던 점 등을 고려해 손해배상을 60%로 제한하며 8억9900여 만원의 배상 책임이 있다.’
이것은 마치 멀쩡히 서있던 열차를 손댔던 것처럼 말을 합니다. 이 질병이 어떤 악결과를 향해 가고 있었고 의사가 수술로 막은 악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습니다. 이 경우 의사가 악결과를 막은 가치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의사가 질병을 만들어서 수술을 했나요? 잃어버린 삶을 배상액으로 계산하려면 선물 받은 삶을 계산해 보수를 주고 나서 계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의료의 특성을 무시하고 내리는 판결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판결들은 의사들로 하여금 자칫하면 심각한 악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를 모두 그만두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료서비스가 국민건강보험이라는 공적 보험을 통해 제공되고 있고, 환자를 거부할 권리를 주지 않은 이상, 의료 서비스 중에 발생한 손해배상책임도 공적보험이 부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보험수가에 위험도를 반영해서 묻어두었으니 알아서 배상하라는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해야 합니다.
일반인도 잘 아는 맹장수술(충수절제술)을 보겠습니다. 의원급의 충수절제술 보험수가 총액은 337,284원입니다. 이중 의사의 기술료는 75,003원입니다. 위험도 비용은 15,329원입니다. 이제라도 수가에 묻어두었다는 모든 위험도 수가를 건강보험공단이 다 가져가고 공단이 배상하도록 해야 합니다.
개인의 뜻과 무관하게 모든 의사를 강제로 징발해서, 의료법에 하자 없는 진료내용도 심평원 기준에 따라 맘대로 삭감하고,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가에 수가계약도 일방적입니다. 악결과를 막기위해서 노력했는데 막은 악결과는 쳐다보지도 않고 또다른 악결과를 초래했다며 걸핏하면 억대 배상금에 법정구속까지!
우리는 이런 보험, 더 이상 못합니다. 니가 해라, 건강보험!
2023. 10. 11.
미래의료포럼 대표 주수호